삼삼오오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이 알록달록 한지를 오려 각접시를 꾸미거나 옛날이야기를 나눌 때면 으레 할머니들이 먼저 한 마디씩 정겹게 추임새를 넣는다.
“우리 어려실때는 이런 거 다 맹글어신디··· 이젠 눈 어두와부난···”
“어멍하고 성들이 이런 이야기 다 해 줬주게. 다 들어나서. 정어신 정수냄이영··· 자청비영··· 조왕신 남씨부인이영··· 이거 들으난 생각나졈쪄··· 지금은 별나라 가는 세상이라부난 다 미신이랜 햄주마는···”
“옛날엔 뒷마당에 칠성도 모셔나서··· 잘 안 모시믄 집안 망해분댄 했주게··· 우리 옆집에 살아난 누구 어멍네도 마당에 구랭이 나왔잰 무쇠솥으로 엎엉 내부난 구랭이 죽어분후엔 폭삭 집안 망해서.”
준비한 내용에 당신네가 살아 온 이야기들이 얹혀 지며 경로당은 이미 현재의 의미를 벗어나 살아있는 역사의 시공간으로 변해간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젊은이들은 절대 경험해보지 못한 공간으로의 이동이 일어난다.
관심 없는 척 멀리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들도 살짝 방석을 이쪽으로 돌려 앉는다. 헛기침하며 한 쪽 귀퉁이에 놓여있는 큰 글씨로 복사해 온 이야기를 아닌 척 하고 펼쳐 보다가 돋보기를 내려놓고는
“게믄 나도 하나 만들어보카?”
하고 쓰윽 틈새로 들어오신다. 젊은 시절 집안의 크고 작은 도구를 만지던 두툼한 손으로 솜씨 있게 척척 만들어낸다.

어느덧 관절이 아프고 손이 떨려 가위질 못한다고 구경만 하겠다고 하던 분들의 손에서 기메의 살장(제주도 굿에 쓰이는 기메 중 하나로, 종이로 만든 무구)은 접시의 바닥 무늬가 되고, 영감가면은 돌하르방으로 변하고, 남은 자투리 조각들은 기러기가 되어 종이접시 밑면에서 날아다닌다.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이 오리기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면 어르신들의 구수한 언어를 사용해 아주 간단한 그림자놀이를 시도할 계획이다. 익숙하지 않은 한지 오리기로 거칠게 표현되는 인물들이지만 그 속에 숨겨있는 지난 삶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가믄장아기가 언니들에게 구박받을 때는 당신네가 구박받던 며느리가 되고, 밭 갈라고 같이 보낸 소를 잡아먹고 늘어지게 낮잠 자다 온 정수남이를 보고는 영락없이 바가지 긁는 마누라가 되었다가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모시면서 고생하고 쫓기는 한락궁이를 만나면 어느 새 돈 없어 설움 받던 시절의 젊은이로 돌아가 천리개와 만리개와 맞서 싸우고 있다. 당신네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기록해 놓지 못하는 우리의 좁은 식견이 죄송할 따름이다.

이렇게 지역 어르신들과의 만남이 삼양동과 일도이동에 이어 선흘리까지 이어졌다. 어르신들과 만나는 일이 처음부터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제주의 어르신들은 바쁘다. 더구나 시골의 어르신들은 그 연세가 되도록 쉬는 일이 없다. 바다에서, 밭에서, 그리고 고사리 철에는 새벽이슬 받으며 들로 나가 허리를 펼 틈 없이 보송보송한 아기 고사리를 꺾어야 한다. 그냥 그게 삶인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분들에게 놀이는 낯선 것이다. 그래서 먼저 청소부터 한다. 벽에 걸린 거미줄도 떼어 드리고 10년 이상 그 자리에 걸려 있는 역대 노인 회장들의 사진틀도 닦는다. 청소가 끝나면 달달한 믹스커피를 타서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얘기로 시작한다.
이제는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보건소에 들렀다 집으로 안 가고 하나 둘 짝을 지어 경로당에 먼저 와서 기다려 준다. 그리고는 우리의 안색을 먼저 살펴본다. 출출한 날 양은냄비에 끓여 주는 라면은 더욱 사랑스럽다.
조용히 다가와 일상의 작은 재미를 다시 찾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모습이 의미 있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노라고 하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당신네들의 그 멋드러진 삶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어르신들, 진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