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전교생 26명의 작은 마을 선흘분교가 있다.
교문을 들어서면 교무실 앞 오래된 후박나무와 천연잔디가 깔린 운동장, 학교를 빙 둘러싼 채 큰 키를 자랑하며 서있는 나이가 많은 나무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이라 추운날씨에도 운동장에 나와 있던 아이들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오늘은 무얼 할 것이냐고 물어온다.
“편집해야지!”
“에이~ 그러지 말고 오늘은 영화 봐요. 1~2학년들은 영화 보잖아요?”
아직 편집이 남아있고, 그 편집이란 것이 지루한 작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들이 영화를 보자고 졸라댄다.
아직 너무 어려서 감상이나 감각놀이를 위주로 하는 동생들이 부러웠나 보다.
“음.. 그럼 수업시간에 함께 의논해 봅시다. 편집도 해야 하니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화보기로 정하자고 자기들끼리 귀여운 담합을 하기도 한다. 올해로 2년째,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아이들은 참 예쁘다.

‘영화’가 무엇인지, ‘왜?’ 영화수업을 하는지는 관계없이 그저 카메라를 만져보는 것이 좋은 아이들이다.
모두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연기’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마치 새롭고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한 것처럼 왁자지껄하게 또 야단스럽게 즐겨주어서 고맙다.
‘쇼트’니 ‘앵글’이니 하는 어려운 전문용어들은 다 잊어버렸지만, 배경이 나와야 할 땐 멀리서 찍어야 하고, 대사를 할 땐 가까이서 찍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또 무겁고 귀찮다는 이유로 삼각대는 버리고 어지럽게 흔들리는 화면에도 상관없이 ‘핸드헬드’만 고집하며, 스스로 작성했던 촬영계획은 잊어버리고 하루에 2~3컷도 촬영하기 어렵도록 툭하면 장난치느라 수업시간을 넘겨버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올해 2학년인 아이들, 작년엔 갓 입학해서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로 40분 수업시간에 적응 못해 힘들어 하던 꼬마들이 이젠 1학년 동생들을 도와주며, 제법 의젓해졌다. 이제는 감각놀이나 사진보다는 동영상 영화를 찍고 싶다며 자신만만하게 의견을 주장하며 기어이 짧은 이야기 한편을 만들었다. 부족한 컴퓨터로 인해 2명씩 짝을 지어주니, 제법 동생들을 챙기며 하나씩 아는 것들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여전히 장난처럼 엉뚱한 편집이지만, 저 또래의 아이들은 그런 것들이 재밌고 좋은가 보다. 서로 돌려가며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서로 깔깔거리며 웃는다.

“감독이 컷! 하고 나서도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면 안돼요. 연결 장면이니까!”
몇 번을 알려줘도 잊어버리고, ‘컷’소리가 나기 무섭게 이리저리 제멋대로 장난치며 돌아다니는 배우들...
감독인 5~6학년 선배들에게 기어이 한 소리를 들었나 보다. 몰래 다가와 선배들이 ‘대장’처럼 행동한다며 살며시 고자질도 한다.
아이들에게 영화시간은 수업시간이기 보다는 놀이시간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화를 내고 싶을 만큼 장난스럽게, 때로는 자기들끼리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알아서 화해해 나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이 참 예쁘다.
예술교육은 과제의 완성보다는 과정을 알아가며 이해하는 교육이니까!

영화교육은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모두가 의견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어 서로가 감독이 되고 배우가 되어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어려운 이론도 알아야 하지만, 직접 체험해보며 느끼는 것이 더 많기에 놀이처럼 진행 되어도 괜찮다. 처음엔 주어진 자율성에 익숙하지 못해 잦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고, 모든 것을 선생님에게 물어보던 아이들이 이제는 큰 틀만 정해주면 스스로 작은 일정을 세우고, 수업내용을 정해 진행하게 되었다.

2008년 처음 예술강사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9년차.
무조건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만 했던 아무것도 모르던 시간을 지나, 아이들과의 생활이 익숙해진 지금까지도 나는 교육이 참 어렵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시대가 다른 아이들, 학년마다 다르고 학교마다 다르다.
내 생각을 강요할 수도 없고, 아이들의 생각을 전부 들어주는 것도 어렵다.
아이들도 나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선생님은 왜 맨 날 웃어요?”
그 동안 심심찮게 들어온 물음을 오늘도 한 아이가 물어온다.
“왜? 선생님이 화내면 좋겠어요?”
“그건 아니지만, 우리가 이렇게 떠들고 장난치는데 왜 화를 안내세요?”
“여러분이 어린이니까요. 떠들지도 않고 장난도 안치고 선생님 말을 아주 잘 들으면 그건 어른이지 어린이가 아니잖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니 내 대답이 아이에겐 조금 어려웠나 보다.
그래도 너희들이 장난이 심한 것은 알고 있었구나싶어 또 살며시 웃음이 난다.
‘내가 너무 무른 걸까?’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아이들에겐 때론 엄한 꾸중도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화가 나다가도 사라져 버리곤 한다.
1학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다. 1~2학년 수업시간에 1학년은 자기소개하기, 2학년은 친구소개하기와 활동지 수업을 한 적이 있다. 2학년 여자아이 중에 한 아이가 갑자기 짝꿍에게 화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해서 한참을 달래주어야 했는데 알고 보니 활동지에 바지를 입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였다.
갑자기 화를 내는 짝꿍에게 저도 화가 났을 만도 한데, 활동지 바지위로 예쁜 치마를 그려주고 ‘무슨 색 좋아해?’
라며 친구가 좋아하는 색으로 예쁘게 색칠까지 해주던 아이, 그런 아이들인데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이야기(시나리오) 만들기 시간에 진지하게 이야기를 만들다 말고 엉뚱한 이야기에 빠져 한 시간 내내 웃어대느라 계획된 시간을 훨씬 넘겨버리고는 다음 수업시간에 엉뚱한 이야기를 집어넣은 시나리오를 만들어 와서 보여주는 아이들, 수업시간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동생이 걱정되어 동생과 같은 모둠이 되게 해달라고 살짝 부탁해 오는 마음착한 언니, 그런 언니 마음을 아는 건지 언니 말이라면 꼭 지키는 동생도 있다.
장난만 치느라 수업시간을 넘겨버리기 일쑤인 남자아이들 때문에 화가 나서 선생님 꼭 혼 좀 내주라며 이야기 하다가 선생님보다 더 엄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기어코 그 날 촬영 분을 모두 마무리 짓는 무서운 누나도 있다.

수업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진도에 몇 번이나 계획을 수정해야 하고, 부족한 기자재와 시설들로 인해 제한되는 빠듯한 수업을 해야 하는데도 수업 내내 얼굴에 웃음이 지어지는 것은 아마도 그런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인가 보다.

드디어 아이들이 바라는 영화감상 시간.
수업시간이 짧아 여러 시간 나누어 보게 되는 불편함이 있지만, 감상시간은 영화교육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자신들이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때로는 먼 나라의 문화를 배우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아이들에게 많은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1~2학년 어린 아이들은 주로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게 하지만, 3~6학년의 경우에는 애니메이션보다는 실사영화 위주로 감상하는 편이다.
또래 영화 감상을 통해서는 자신들과 같은 나이의 다른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영화들을 만들고 있는지 학습하기도 하고 자신들과 비교해보기도 하면서 조금씩 영화라는 것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기존의 상업 영화중에는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가 드물어서 감상을 할 때마다 영화를 고르기가 힘든 어려움도 있다. 영화감상 시간에는 주로 감상만 하지만, 때론 연령제한등급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감상을 위한 자세나 에티켓을 겸해서 익히기도 하는데 이론적인 설명만 하는 수업보다는 훨씬 효과적이다.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드디어 감상하게 된 영화는 ‘마음이’다. 이미 오래된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많이 낮선 ‘마음이’ 속의 이야기들.
한 아이는 영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너무 슬픈 영화에요!”라고 이야기 한다. 영화 속 ‘유승호’가 귀엽다며 소리치는 여자아이들도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영화 속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어 소리 지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아이들.
“저 아저씨 나빠요. 왜 그래요? 저 개가 불쌍해요.”
영화 감상하는 중간 중간 시대적 배경에 대해 알려주고, 각 인물들에 대해 기본적인 설정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감정이입 되어 우는 아이들도 달래가면서 또 다시 웃음이 나온다. 우리 아이들은 감수성도 예민하고 마음이 너무 예뻐서 금방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어른이 되면서 조금씩 무뎌져 버린 감정들이 아이들을 만나면서 점점 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있어서 화를 내려다가도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해 나가는 일은 때로는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기대되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많아서 나는 맨 날 웃기만 하는 것 같다.

“선생님, 우리 내년에는 영화감상 더 많이 해요.”
“아직 편집도 안 끝냈으면서 무슨 내년 얘기에요?”
“에이. 편집은 다음 주에 할게요. 쉬는 시간이랑 점심시간에도 하면 되잖아요.”
벌써부터 내년 수업계획을 생각하는 아이들, 내년에는 꼭 영화를 많이 보여 달라며 졸라댄다.
“글쎄. 내년에도 우리가 함께 수업하게 되면 얘기하도록 합시다. 혹시 선생님
이 잊어버리고 있으면 여러분이 알려주세요. 알겠죠?”
내년에는 꼭 영화를 많이 보자고 두 번 세 번 이야기하는 아이들에게 확실한 대답을 해줄 수 없어서 조금 슬프다.

예술 강사라는 직업은 해마다 평가를 받고, 해마다 배치를 다시 받아야 한다.
그렇다 보니 다음 해에 대한 기약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쉽게 약속을 해줄 수가 없다. 저 예쁜 아이들의 작은 손가락을 마주 걸고 도장을 꾹꾹 눌러줄 수 없어서 조금은 서글프고, 조금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이 예술 강사라는 직업은 참 멋진 일이다.
9년 전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 숙한 상태에서 시작하게 된 예술 강사라는 이 불안한 선택이 9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은 것은 이런 예쁜 아이들이 해마다 나와 함께 해주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이 예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한편으론 불안하고 또 한편으론 막연한 기대감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