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아이들이 있다

지난 2015년 3월 16일, 추자도 아이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제주항에서 쾌속선을 타고도 왕복 3시간! 추자도는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예상보다 먼 섬이었다. ‘혹시 뱃멀미가 있지 않느냐’ 걱정하시던 추자중학교 담당선생님의 염려에 나는 ‘전생에 뱃사람이었나 보다’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멀미가 없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추자도로 수업을 오는 선생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1순위의 고역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 추자에 있는 추자초등학교와 하 추자에 있는 추자초등학교 신양분교, 추자중학교 수업을 하루 안에 모두 끝내야만 했다. 한 시간에 한 대 이동하는 버스를 타고 상 추자와 하 추자를 오가며, 1교시부터 7교시까지 세 학교의 아이들을 모두 만나고 나면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제주를 향하는 배에 오르곤 하였다. 하지만 한 주, 한 주 수업이 거듭 될수록 “선생님, 오늘은 무슨 수업해요?”, “오늘도 연극놀이해요?” 라고 묻는 아이들의 호기심어린 질문이 ‘엄청나게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고 싶다고 내 의지를 자극했다. 가끔 날씨 때문에 제주로 못 돌아가는 날에는 오히려 연극 수업을 또 하자며 좋아라하는 아이들을 보면 짠하기도 했다. 그러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추자도를 향하는 배에 오른다.

어렵지만 즐거워! 즉흥극 만들기

“연극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거야.”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이들에게 마법의 선물상자를 전달하면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멋진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바로 그 상자!” 어색해하던 아이들이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자 안에는 컴퓨터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야구공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마음으로만 보이는 공을 던지고 피하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그래, 그렇게 상상력을 발휘해 봐!” 라며 응원을 하였다. 연극을 선생님이 정해준 대본의 대사를 외워서 발표하는 것으로만 알던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서 찾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보자고 하자 “그걸 어떻게 해요?”, “그냥 대본가지고 하면 안돼요?”,
“너무 어려워요.” 하는 항의가 빗발쳤다.
“그럼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동화를 연극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각자 역할을 맡아서 즉흥극으로!”
“즉흥극이요? 그럼 대사도 막 자기 혼자 생각해서 해요?”
“그럼 당연하지! 바로 떠오르는 대사를 말해 보는 거야. 자유롭게!”
“대사를 어떻게 지어내요?”
“각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다 알고 있잖아. 그 말을 하면 돼! 내가 맡은 역할이 하고 싶어 하는 말!”
아이들은 가만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만 않았다. 어느 순간 동화를 선택하고, 각자 역할을 맡고, 교실 곳곳에 있는 소품들을 활용해서 연극을 만들어 나갔다. 배우가 모자라자 지켜보던 선생님도 참여하고, 나도 해설을 맡아 참여했다. 어떤 학교에서는 <흥부와 놀부>를, 어떤 학교에서는 <백설 공주>를, 어떤 학교에서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즉석에서 연극으로 만들어냈다. 즉흥적인 상상력을 신나게 발휘하며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달리 생각해 봐! 이야기 뒤집기

그렇게 2015년 봄, 여름이 가고 다시 가을을 맞이하며 아이들과 만난 날.
나는 아이들에게 1학기에 발표했던 동화의 엔딩을 바꿔보자고 하였다. “엔딩이 달라지려면 뭐가 달라져야할까?”
나의 질문에 아이들은 “당연히 이야기가 달라져야죠!”라고 응수했다.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알쏭달쏭한 질문에 다시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백설 공주가, 공주가 아니라면 엔딩은 어떻게 달라지지? 만약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얻은 박씨를 심지 않는다면? 주인공의 선택이 달라지니 엔딩도 달라지겠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선택한 동화를 뒤집는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백설 공주>는 사실 아주 못생긴 공주였고, 난장이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고운 심성과 인내심으로 왕비를 물리쳤다.
<흥부와 놀부>의 흥부는 제비의 도움을 받지만, 박씨가 아니라 놀부가 가져 간 자신의 재산을 되찾아 오는 방법을 선택하는 이야기가 탄생했다.
공동 창작한 대본을 정리하고 연극 놀이를 활용한 연극 만들기와 최종 발표도 이루어졌다. 연극을 본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격려 속에서 아이들은 한 뼘씩 성장해있었다.

또 다시 그 섬으로⋯

1년의 수업을 마치고, 2016년 올 해 다시 추자도를 찾았다.
이번에는 중학교 수업만을 맡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이었지만 이미 1년간의 연극 수업을 거친 아이들은 선배들과 동등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몸으로 적극 표현하면서 수업을 주도하였다. 작년 이 맘 때와 달랐다. 연극 만들기를 몸으로 체화한 아이들답게 즉흥극 만들기를 즐기고, 이야기를 달리보고, 공동창작을 생활화하였다.
모든 예술적 창의성은 자유로운 놀이에서 시작한다. 놀이로 즉흥극을 만들고 나면 만들어진 즉흥극에 관해 질문한다. 질문이 다양할수록 아이들의 상상력은 자극되고, 다른 관점의 대답들이 많을수록 재창조되는 연극을 풍요롭게 채운다. 때로는 도서관에서, 때로는 친구와 가족 간의 사연에서 아이들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연극으로 탈바꿈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연극의 ‘카타르시스’를 보고 느끼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극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추자 아이들의 연극 만들기는 아이들이 겪은 시간 속에서 발전했으며, 아직도 현재진행중이다. 이번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공동창작 대본을 드디어 완성했다며 아이 한 명이 대표로 메일을 보내왔다. 이번에도 또 <백설 공주>다.
하지만 작년과 다르다. 어떻게든 달리 보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반갑고, 서로의 의견을 모아 함께 쓴 공동의 노력이 고맙다. 반갑고도 고마운 아이들, 추자 아이들을 만나러 조만간 다시 제주항에서 쾌속선을 탈 것이다.

얘들아, 무더운 여름 몸 건강히 잘 지내⋯ 2학기에 만나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