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같은 사회복지시설에서는 대상자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은 대체적으로 획일적이거나 그들이 갖고 있는 장애의 특성을 고려한 무난한 난이도의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무료함을 느끼기도 하고, 새롭고 획기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갈망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 곳 신장장애인주간보호센터에서도 이용자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어떠한 장애도 보이지 않아 모든 활동이 다 가능할 것이라 생각이 되지만, 신장의 기능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그들에겐 활동의 제약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프로그램을 계획함에 있어서도 신장장애로 인해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얀 눈이 머리 위에 소복이 쌓인 듯 새하얀 백발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어르신 이용자는 오늘도 빈 종이위에 펜을 끼적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신다.
“오늘도 낙서하세요?”라고 여쭤보니
“응, 난 낙서하는게 좋아” 라며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시고는 또다시 떨리는 손으로 까만 글씨를 써 내려가신다.
문득 그런 그의 모습에서 행복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작은 끼적거림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니. 왜 항상 거창하고 특별한 프로그램만을 꿈꿔 왔었는지, 잠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그래,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도전을 해보자. 어떠한 규칙도, 원칙도 없이 자유롭게 글씨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캘리그라피에 도전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사전에 이용자분들에게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해드리니 다들 도전의식이 샘솟는 듯 했다. 단순히 글씨를 쓰는 활동만이 아닌, 지금껏 제주땅에서 살아온 그들의 이야기와 감성을 담은 시도 직접 지어서 자신만의 고유한 글씨로 써보기로 하였다.

2017년 4월. 장애인문화예술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곱들락헌 제주어 그리기」란 이름으로 캘리그라피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화선지, 붓, 벼루, 먹 등 어렸을 적 학교에서 많이 접해보았을 법한 친숙한 물건들이 책상 위에 놓여져 있고, 먹 향이 프로그램실 안을 가득 채웠다. 오랜만에 먹물 글씨를 써본다며 이용자분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대부분이 ‘캘리그라피’의 ‘ㅋ’도 모르는 고령의 어르신들이라 붓을 잡는 손은 계속해서 떨리고, 강사의 가르침대로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설레임과 즐거움만큼은 최고였던 것 같다.

선 긋기를 시작으로 캘리그라피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이미지가 담겨 있는 글씨 쓰기, 붓펜, 꼬챙이 등을 활용한 글씨 쓰기, 한국화 물감을 이용한 수채화 그림그리기, 그리고 부채, 캔들, 종이컵 등을 이용한 작품 만들기 등등 다양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 가운데 제주어로 시를 짓는 활동도 함께 진행되었는데 여성 어르신 이용자들은 연필을 잡는 것조차 어색한 자신들이 어떻게 시를 짓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생활의 모든 사물들과 생각들, 심지어 그들의 대화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시로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더니 신기해하며 자신의 시에 대한 애착을 보이기도 하였다. 몰랐던 제주어도 공부하면서 그렇게 우여곡절의 8개월이란 시간을 달려왔다.
처음엔 프로그램을 종결할 즈음이면 이용자들이 마치 캘리그라피 작가처럼 실력이 많이 향상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내 예상과 달랐다. 수십년을 자신의 글씨체로 살아온 어르신들이기에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글씨체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글씨는 정말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는데, 그 미세한 변화가 얼마나 많은 노력 끝에 얻어낸 결과인지는 옆에서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규칙도, 원칙도 없는 삐뚤빼뚤한 그들의 글씨가 너무나도 좋다. 캘리그라피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이용자들이 묵직하게 써나가는 글씨, 그 속에 담긴 즐거움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감성이 바로 정답이 아닐까 싶다.

지난 12월 9~11일 타 기관들과 연계하여 연합전시회를 가졌다. 8개 기관이 참여를 했는데, 우리 센터 이용자들의 제주어 자작시를 담은 캘리그라피 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전문적인 작가들처럼 세련된 시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순수함이 담겨있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우리의 작품을 관람하는 이들도 생소한 제주 사투리 표현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나누기도 하였다. 전시회 작품 제작에 참여한 이용자들이 자신의 작품들이 전시된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관람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시에 대한 부연설명을 해 주는 모습을 보며, 이런 과정들을 통해 참여자들이 즐거운 삶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들의 문화예술활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자신의 생각과 감성을 종이 위에 낙서로 표현하는 그 어르신처럼, 생활속에서 작은 즐거움이라도 찾을 수 있는 활동이라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문화예술활동이 아닐까.